엄청난 보물이 묻힌 곳과 그 곳이 표시
된 보물지도가 경기서해안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으나 보다 정확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랜기간 여러 사람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어렵게 맞춰 본 바에 따르면
아래와 같지만 보물 과 보물지도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이야기는 생사를
함께 하며 보물을 찾으러 갈 동지들과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항후 배위에서만
이야기 할 수있는 것에 대해 이해 해주기
바란다.
16세기무렵, 동서양에 걸쳐 급속히 발전된 선박기술 과 항해기술로 인해 신세계에서 노획된 각종 보물
의 운반 과 해양무역이 번성하게 되고 이 보물선과 무역선을 노린 해적이 도처에 출몰하게 되었다.
이즈음 아시아지역에서는 지금의 동중국해와 황해일대에서 감합선(勘合船)에 의한 명과 일본간 무역이 끊어지자 해적인 왜구(倭寇)에 의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초기 왜구는 주로 한반도주변인 지금의 황해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점차 중국 연안인 지금의 동중국해와 인도양으로 진출해 갔다.
특히 감합선무역이 중단된 이후 명나라의 가정연간(1522-66년)을 중심으로 약 40년간 왜구로 부터의 피해가 많았다.
이런 왜구에 대항하는 리마홍(林鳳)이 이끄는 해적 집단이 동중국해를 중심으로 출현하였다.
당시 그는 왜구의 거물해적들이 명정부에게 살해 당한 뒤, 왕직(王直)과 서해(徐海) 같은 잔당을 흡수하여 200여척의 배에 만여명의 인원을 거느린 아시아최대해적세력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해적의 제거에 힘을 기울였고 리마홍 역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해적 리마홍은 왜구를 제압하고 아시아일대 조공선박과 무역선을 약탈하며 통행료등을 받아 성장하였다.이 리마홍의 부하중 2인자인 왕자춘이 있었는 데 두목자리를 빼앗고자 내부반란을 일으키지만
리마홍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 인도양쪽으로 잠적하게 되었다.
이즈음 서양에서도 해적이 번성하였는 데 금은보화를 실은 무역선등을 공격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귀중품을 약탈하였다.
당시 해양강대국인 영국 정부는 헨리 모건(Henry Morgan)을 자메이카 부총독에 임명하여 해적 진압을 담당케 하였는데 정부의 신임을 이용해 해적 선단을 토벌하던 헨리 모건은 도리어 해적왕으로 군림하였고 이론 인해 영국 정부로 부터 버림을 받게 되어 서인도 해역으로 추방되어 서인도해안일대에서 겨우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중 비슷한 처지의 왕자춘과 합류하게 되어 다시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해적들이 강성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왕자춘이 다시 아시아지역에서 계속 세력확대를 하며 금은보화를 모으던 중 다시 아시아해적왕인 리마홍(林鳳)과 황해에서 큰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게 되어 본거지로 돌아 가던 중 태풍을 만나 한반도 서해안 무인도에 당도하게 되었다.
왕자춘일당은 파손된 배로 인해 본거지로 돌아갈 수도 헨리모건선단에 합류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당시 가지고 있던 보물 대부분을 몰래 무인도에 매장하고 경기 서해안어딘가에 정착을 하게 된다.
이후 해적후손들은 신분을 감추고 그들만의 비밀 보물지도와 암호를 통해
자신들의 선조가 감추어 둔 보물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경기서해안인근에 가라앉은 해적선 일부가 발굴되면서 부근 어느 무인도에 옛 해적 들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풍문으로 전해 지다가 최근 해적의 보물을 찾기 위해 보물 사냥꾼들이 모이게 되었고 이를 막기 위한 해적후손들의 결집이 시작되면서 어섬 일대에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암투가 계속 되고 있다.